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(문단 편집) === 위장공격과 매복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 -5px" [[파일:noryang_battle_map.jpg|width=100%]]}}} || || 노량 해전 직전의 전개도 (12월 15일) || '''1598년 12월 15일(음력 11월 18일) 늦은 오후''' * [[이순신]]은 [[진린]]을 찾았고, 함께 출전했다.[* 명나라 입장에선 일본이 재침을 해도 이제 자국까지 전쟁이 번지기 어려워졌으므로 소극적일 수 있다. 하지만 진린 입장에서 이순신이 그간 수급-전리품을 챙겨주며 크게 접대한 점, 왜교성 전투에서 목숨을 살려준 점 등 통솔력-외교력을 발휘했기에, 명나라 수군도 함께 참전한 것이다. 두 보고 내용이 엇갈려 울며 청했는지, 단호히 박차고 나갔는지는 확실치 않다.] * 1598년 12월 19일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, 이순신은 "연락선이 순천을 떠난지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. 먼저 나아가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"라 하였다. [[진린]]은 소극적 모습을 보였다. 이에 [[이순신]]이 눈물 흘리며 청하자 함께 하기로 했다. * 1599년 2월 2일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, 이순신은 "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 당도할 것이니, 난 먼저 가서 요격하겠다" 하고, 진린은 허락하지 않았지만, 이순신이 듣지 않고 단호히 나팔을 불며 배를 띄우자, 진린이 어쩔 수 없이 함께 따랐다고 했다. * [[진린]]과 [[등자룡]]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 2척에 나눠 타고 출전했다. 그 뒤를 사선-호선들이 뒤따랐다. * [[이순신]]은 함대를 셋으로 나눴다. 서쪽의 [[순천왜성]]을 위장공격하려는 극소수의 위장함대,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/복병함대. 여수 좌수영에서 동쪽의 노량해협까지 노를 저어 하루 반절이 걸렸다.[* 여수 좌수영에서 노량해협까지 24km며, 조선 수군은 약 5~6km/h이므로 최소 4시간, 전략적 배치에 1~2시간을 생각하면 늦어도 오후 3-4시에 출발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.] '''1598년 12월 15일(음력 11월 18일) 늦은 밤''' * 해가 지고 한밤중, [[이순신]]의 위장함대가 서쪽의 [[순천왜성]]을 무너뜨릴듯 포격하며 상륙할 것처럼 위장했다. 순천의 [[고니시 유키나가]]는 '이순신이 연락선이 나간걸 알자, 구원군이 오기 전에 순천왜성을 끝장내려는 것'으로 해석했다. 이에 절박해져 봉화 수준이 아니라 '''산을 불태우며''' 멀리 긴급함을 알렸다. * 창선도의 [[시마즈 요시히로]]는 이 불길을 보고 '조선 수군이 노량 쪽을 막지 않고 순천 쪽으로 갔다'고 해석하고 노량해협을 신속히 통과하기로 결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